SNS에 접속할 때마다 죽음을 생각하다 <디지털 시대의 사후 세계>
디지털 시대의 사후 세계 - 일레인 카스켓.
'자녀에게 '죽음'에 대해 알려줘야 하는 이유'
인간은 '사회적 연결의 욕구'가 있다. 자신의 사회적인 공간을 차지하고, 공동체 안에서 인정, 의미, 가치를 찾아 헤매는 것은 본능적인 행동이다. 내가 갓 성인이 되었을 때 더 많이, 더 자주, 더 넓게 사회적으로 연결되려 발버둥 치며 몸을 혹사시키던 시절과 불과 10년이 채 지나지 않은 지금을 비교해보면 큰 차이가 있다.
바야흐로 본격적인 'SNS 시대'가 시작됐다.
인간의 연결 욕구에 부응하듯, 24시간 연중무휴로 열려있는 SNS는 새로운 패러다임의 시작을 알렸다.
전통 미디어의 '광고'는 대부분 비용 대비 효과가 확연히 차이나는 온라인 플랫폼과 SNS에 빼앗겼다.
SNS 상에서 많은 젊은 이들은 자신의 '페르소나'를 만들어 '보여주기 위한 나'의 이미지 메이킹에 열을 올렸다.
'우물 정'자로만 알고 있던 #의 기능은 '해시태그'로 비약적인 도약을 이뤘다.
그 안에서 보여주기 위한 '팔로우 숫자'를 늘리려 '선팔맞팔'을 외치며 관심을 갈구하는 모습도 흔히 볼 수 있다.
이제 누구나 연결을 원하면 어디서든 손가락으로 욕구를 해소할 수 있다. '연결의 밀도'는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 높다. 어쩌면 인류의 사회적 연결에 대한 욕구는 상당 부분 해소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짧은 시간에 이뤄진 급성장에 부작용이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불과 10년이 조금 넘는 역사를 갖고 있는 '급진적이고 거대한 흐름'은 내가 상상했던 차원 이상의 문제점을 갖고 있었다. 바로 '죽음에 관한 이슈'이다. 우리가 디지털 시대를 향유하는 동안 그 뒤에 남겨진 '나의 디지털 발자국'에 대해서 크게 생각해 본 적이 있을까?
나는 이제 20대가 끝나가는 시점에서 나의 죽음에 대해 깊게 생각해 보거나 걱정하지 않았다. 이런 걱정은 노년기에 해야 할 고민이라 생각하며 필요성을 못 느꼈기 때문이다. 하지만 '죽음이 갖는 의미'를 알고, 디지털 시대에서 죽음의 연장선에 대해서 보고 나니 생각이 달라졌다.
일레인 카스켓 박사님의 「디지털 시대의 사후 세계」는 이러한 급변하는 세상에서 우리가 생각해봐야 할 것에 대해 물음을 던진다. 이 책을 통해 '달라진 세상에 대한 새로운 시각'과, '변화의 장·단점'에 대해 알 수 있었고, 가장 인상 깊은 '죽음이 갖는 의미'에 대해서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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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 노멀, 손가락 끝에서 이뤄지는 무한 연결'
불과 10여 년 전만 해도 내 주위에는 카카오톡보다 SMS를 이용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하지만 지금 주위를 둘러보면 스마트폰이 마치 신체의 일부인 것처럼 삶의 필수적인 요소로 자리를 굳혀가고 있는 듯 보인다. 이 '똑똑한 전화기'는 전화기 본래의 목적인, '정보 조달자'의 역할을 역사상 가장 효율적으로 수행하는 것뿐 아닌 그 이상의 역할을 하고 있다.
인간이 창조한 '0과 1의 세상'에서는 각자 원하는 방식으로 자신을 표현하고, 무에서 유를 만들고 있다. 창조의 과정에서 남겨진 흔적들은 사후에도 그 자리에 그대로 남겨질 수 있고, 그 속에서 육체는 떠났어도 사회적 역할을 어느 정도 책임지며 연결된 상태에 머무른다.
이러한 영향력은 삶의 많은 부분에 변화를 가져왔고, 나아가 고인을 모시는 장소 역할마저도 온라인 상으로 옮겨가는 기묘한 일들이 벌어지는 세상이 왔다. 이에 발맞춰 월간 24억 명 이상이 사용하는 페이스북이 디지털 공동묘지를 열었다.
'온라인에 뿌려진 뼛가루'
고인을 애도하는 과정은 보통 묘지를 찾아가거나, 기도를 해주거나, 같이 갔던 장소를 찾아가거나, 추억거리와 사진 등을 찾아보는 행위로 이뤄져 왔다. 그러나 지금은 애도의 과정마저 손가락이 해결해 주는 세상이 왔다. 페이스북의 '기념 계정 관리'나 '월드 와이드 세미트리'는 세상을 떠난 이들의 디지털 발자취를 보관하고 기억하거나 애도하는 장소를 제공했다.
가깝게 지내던 주위 사람의 고별 소식만큼 정서적인 충격을 주는 사건이 또 있을까? 사람들은 이런 상황에서 고인과 지속적으로 연결된 느낌을 받고 싶어 한다. 소중한 사람이라면 손에서 놓아버린 상태가 아닌 1년, 10년, 아니 죽을 때까지 잊지 않고 지속적으로 '애도'를 표현한다. 이제는 남겨진 사람의 '외로운 고통'의 해독제로 접근성이 좋은 '온라인 애도'를 택하는 사람들이 나오고 있다.
이러한 현상에 온라인 의사소통의 성격이 한몫을 하고 있다. 보통 내가 보낸 메시지는 보내는 순간 상대방이 받은 듯한 기분이 들기 때문에 이러한 온라인 애도의 문화를 더욱 선호하게 만든 부분이 있다. 이로 인해 고인의 육체는 차가워졌어도, 사회적으로는 새로운 세상 안에서 그 어느 때보다 따듯한 상태를 유지할 수 있게 만들었다.
온라인의 편리성은 우리에게 여러 장점들을 선사했다. 그러나 애도의 과정마저 온라인 상으로 옮겨가고 있는 편리한 세상의 이면에는 여러 문제점 또한 공존하고 있다.
'비자발적 디지털 불로장생'
우리는 온라인상에서 머무는 시간에 비해 현저하게 낮은 주의를 기울인다. 나는 내가 방문하는 사이트들이 얼마나 많은 권한을 갖고 있는지, 내가 내보낸 정보는 어떤 영향력을 갖는지, 그 정보들이 얼마나 오래 그곳에 머무를지에 대해서는 깊게 생각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많은 사람들이 나와 비슷할 것이라 생각한다.
"우리는 자신의 정보에 모든 통제권과 권한을 보유한 듯 보이지만, 동시에 어떤 권한과 통제도 지니지 못한다"
정보화 세상이 열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프라이버시 문제'들이 속속 발생했다. 대량의 정보 유출, 내가 알지 못하는 정보 수집, 심지어 내 개인정보 판매까지. 지금까지 내가 살아있는 동안에만 조심하면 될 거라 생각했지만 오산이었다. 죽은 사람의 이메일, SNS 계정, 클라우드에 저장된 자료들 속에서 프라이버시 문제는 여전히 존재한다.
정보화에 따른 문제는 내가 죽은 후에도 영향력을 행사한다. 내가 죽고 난 후 남겨진 온라인상의 발자국은 그곳에 머물며 남겨진 사람들에게 긍정적/부정적 영향 모두를 끼칠 수 있다. 광범위하게 퍼진 개인적인 정보는 누군가에게는 그리운 보고 싶은 정보들을, 반대로 어떤 이들에게는 그 안에서 보고 싶지 않은 정보들을 갖고 있다.
그 누구도 자신의 죽음을 통제할 수 없다. 그러나 자신의 삶이 기억되는 방식은 통제 가능한 세상에 살고 있다. 이 사실을 아는 사람들은 스스로 경계를 설정해서 미리 대처할 수 있다. 그러면 자신이 죽고 난 후 남겨진 것들이 판도라의 상자가 아닌, 스스로 작성한 자서전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죽음이 선사한 선물'
서문에서 언급한 '죽음에 대한 고민을 노년기로 미뤄도 된다'는 나의 생각은 틀렸다. 나는 죽음이 갖는 의미를 전혀 모르고 있었다. 내가 20대임에도 불구하고 죽음에 대해 고민할 필요성을 느낀 이유는 '결정과 판단의 기준'이 되기 때문이다. 죽음은 자신에게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숙고하고, 거기에 맞게 '선택하고 행동 조절'을 가능 캐 해준다.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생명의 탄생과 죽음이 반복되고 있다. 모두가 자신에게 한정된 시간이 흘러가는 속에서 시한부의 인생을 살고 있다. 그럼에도 죽음에 대해 직면하고 자신의 유한성을 직시한다면, 보다 의식적인 삶을 살기 위해 '죽음을 활용'할 수 있다는 것을 배울 수 있다. 이는 살아있는 동안 '현명한 선택의 기준이 되어 줄 소중한 무기'가 된다.
"가능한 한 가장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삶을 살라, 많이 사랑하라. 살아가는 매 순간을 소중히 여기고 감사하라. 세상을 위해 힘쓰라"
-일레인 카스켓-
책의 맺음말에 있는 저자의 말이다. 아마도 이 책에서 가장 크게 얻어갈 수 있는 '죽음의 의미'에 대해 저자의 생각을 표현한 것 같다. 아이러니하게도 죽는다는 사실을 알고도 많은 사람들이 열심히 살아가는 건 죽음이 주는 선물이 아닐까 생각이 든다. 이 선물이 없다면 본능과 쾌락에 충실한 짐승의 지구가 될게 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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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을 매일 20분씩 하는 사람은 건강한 습관을 갖었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운동을 매일 20시간씩 한다고 건강하게 장수할 것 같지는 않다.
피부 노화를 방지하기 위해 자외선 차단 제품을 바르면 효과적이다. 하지만 자외선에 의한 피부 노화를 막기 위해 햇빛을 아예 차단하고 산다면 결핍이 생긴다.
자녀의 똑똑한 뇌를 위해 어려서부터 뇌 발달에 도움이 되는 학습 기회를 제공한다면, 훗날 주도적인 삶을 살게 도와줄 수 있다. 그러나 교육이란 명분으로 사사건건 관여하고 학습시키려 들면, 자녀는 주도적인 의견 하나조차 내지 못하는 부지런한 바보가 될 것이다.
일레인 카스켓의 「디지털 시대의 사후 세계」를 읽으며 자주 생각난 책이 있다. 니콜라스 카의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뭐든지 과하면 해가 된다. 우리에게 선물처럼 다가온 정보화 세상도 마찬가지이다. SNS에서 잠시도 눈을 떼지 못하는 사람들, 작은 스크린 안에 갇혀버린 어린아이의 생각, 그리고 '생각의 아웃소싱'을 하는 멍청한 편리함을 계속 추구할 필요는 없다.
내가 발 담은 세상이 짧은 정보화 시대의 청소년기에 막 접어든 기분이다. 호기심이 가득하고 다양한 시도로 방향을 찾아가는 중이다. 나도 이 흐름에 잘 따라가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디지털과 죽음의 연결을 보니 내가 살아가는 세상이 다소 낯설게 느껴졌다.
TV 광고에서 어린아이를 먼저 보낸 어머니의 가슴 아픈 모습을 보았다. 이 어머니는 머리와 손에 21세기 도구들을 달고 허공에 슬픈 손짓을 하고 있었다. VR로 너무 일찍 떠나보낸 아이를 만지는 모습이었다. 이 광고는 책에서 나온 온라인 애도 사연들과 마찬가지로 내게 여러 생각이 들게 했다.
이제 죽음의 영역마저 정보화로 물들고 있고, '너무 멀리 간 게 아닐까?' 하는 의문도 든다. 정보화의 확장이 훗날 AI 기술의 발달을 만나면, 영화 트랜센던스의 조니 뎁을 현실에서 마주할지도 모른다. 정보화를 환영만 하기보다 동시에 주의를 기울이는 자세의 필요성을 더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