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 과연 '블랙스완'일까? <대유행병의 시대>
대유행병의 시대 - 마크 호닉스바움.
'예견된 코로나 19'
2020년을 송두리째 집어삼킨 코로나 19, 누군가 이 비극적인 전염병이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던 거라 말하면 믿을 수 있을까? 전 세계가 패닉에 빠진 현실을 본다면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코로나 19는 예상 가능한 전염병이었고, 사전에 방역 기회가 충분히 있던 전염병이다. 단지 인간의 욕심과 이기심 그리고 오만함이 가로막았을 뿐이다.
전염병의 창궐은 전혀 생소하지 않다. 나는 살면서 세 번의 전염병 사태를 경험했고, 과거를 살펴보면 수많은 전염병의 역사가 존재한다. 인류는 전염병을 정복하지 못했다. 그리고 이미 코로나 19가 활개치고 있다고 해서 다른 전염병이 자신의 차례를 얌전히 기다리거나, 우리를 배려해 적당한 기간을 두고 오지도 않을 것이다. 전염병의 위협은 여전히 우리 주위에 존재하고, 언제나 존재해왔다.
마크 호닉스바움의 「대유행병의 시대」는 이러한 전염병의 역사와 반복되는 패턴을 보여준다. 그리고 전염병의 바탕에 깔린 놀랍도록 섬세한 자연의 균형을 보여준다. 그 속에서 전염병을 몰고 오는 인간의 추한 모습 또한 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앞으로 다가올 전염병에 대처하는 자세에 대해 생각할 시간을 선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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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자연의 균형 vs 인간'
전염병의 역사에는 몇 가지 공통점이 존재한다. 그중 하나는 ‘자연의 균형’이다. 놀랍도록 섬세하게 조성된 자연의 균형은 가히 치명적이다. 이러한 균형에 금이 가기 시작하면, 약한 고리부터 서서히 신호가 오기 시작한다. 그러다 어느 순간 ‘생태학적 평형상태’가 무너지고, 자연스러운 상태에서 벗어난 불안한 미생물들은 살아남을 숙주를 찾아 위태로운 이주를 시도한다.
인류 역사에 한 획을 그은 물리적 연결의 힘은, 치명적인 위협을 초래했다. 철로와 도로 건설 때문에 대규모 남성 노동자의 이주해 인구가 밀집된 환경을 만들었다. 거기서 인간의 금기를 깨고 매춘이 활발해지기 시작하고 에이즈가 등장했다. 그리고 세계대전으로 국가 간 대규모 이동과 왕래가 생기고 섞여 생활하며 스페인 독감은 무섭게 퍼졌다. 증기선을 타고 넘어온 페스트 또한 마찬가지다.
인간의 무분별한 벌목, 확장, 개발로 누군가의 보금자리가 빠르게 훼손된다. 자신의 보금자리를 빼앗긴 곤충, 동물, 미생물들은 살기 위해 새로운 생활 방식을 택하는 수밖에 없다. 삶의 터전을 빼앗긴 박쥐는 에볼라를 불러왔고, 인구밀도가 높아진 지역에서 부자연스러운 동물 사육 환경과 야생동물의 유입이 만나 사스는 생명력을 더해갔다. 그리고 돈이 주도하는 배려 없는 사육 환경은 앵무병을 불러왔다.
이렇게 병이 퍼지기 시작하고, 그 시발점이 된 균형을 깨트린 자에게 처절한 복수가 시작된다(영화 컨테이젼에서 그 모습을 잘 담아냈다). 미생물은 여러 생명들을 오가며 수많은 변이를 일으킨다. 그 변이 중 하나라도 인간에게 적응되는 것이 나오는 순간 복수는 유의미한 정도의 피를 불러온다. 자연은 기버가 아닌 매처다. 아낌없이 주는 나무가 아니다. 역사의 사례에서 볼 수 있고, 우리가 지금 경험하듯이 균형의 수호자 역할을 철저히 이행한다.
'테이커, 인간'
인간은 눈부신 발전과 혁신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100년 전에 잠든 사람이 깨어나 아이폰을 본다면 놀라 자빠질 것이다. 하지만 1000년 전에 잠든 사람이 깨어나 세상을 둘러본다면 애플과 삼성 중 어느 쪽을 종교로 택할지 고민에 빠질 것이다. 이렇게 새로운 시대가 열리고 기술이 발전했음에도 전염병의 공격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심지어 전염병은 더욱 강해지고, 빈번해지는 상황에 처해있다. 이러한 상황의 중심에는 인간이 서있다.
“곤경에 빠지는 건 뭔가를 몰라서가 아니다. 뭔가를 확실하게 안다는 착각 때문이다.” -마크 트웨인-
주식시장에 던져진 마크 트웨인의 격언은 전염병에도 적용되는 듯싶다. 이 책의 저자 마크 호닉스바움이 보여준 역사 속 경고도 같은 맥락이다. 전염병의 역사를 통해 과학자들과 권력을 갖은 결정권자들이 강력한 확신을 가질 때 문제는 자만과 함께 크게 번졌다. 불행 중 다행인 점은 소수의 집요한 과학자들 덕에 대부분의 경우 늦게나마 원인을 밝히고 대처를 할 수 있었다.
전염병의 역사를 보니 대부분의 경우 확산 초기에 막을 기회가 충분해 보였다. 하지만 여러 이유들, 특히 정치적이고 물질주의적인 인간의 욕심이 확산을 허락한 경우가 반복적으로 보인다. 2020년을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코로나 19도 마찬가지다. 시진핑의 중국몽, 100년 계획에 티클을 만들기 싫었던 정치권 인사는 봉쇄령이 가져올 경제적, 사회적 타격을 피하려 오랫동안 병의 사실을 숨기기 급급했다. 몇몇 인간의 역겨운 선택의 결과 전염병은 한 달간 무섭게 퍼졌고, 그 결과 전 세계가 쓰라린 상처를 안고 살아가고 있다.
그 외에도 인간의 욕심이 불러온 무리한 사육환경, 밀수입 수출, 야생동물 유통은 전염병을 부추긴 또 다른 이유다. 돈이 주도하는 경제 앞에서 양심, 도덕이 사라지는 경우는 진부할 정도로 빈번하게 발생한다. 변화가 필요하다.
'질적인 도약'
전염병이 크게 확산되는 원인은 누가 봐도 명확해 보인다. 인간의 개입이다. 이러한 개입이 코로나 19가 가져온 경각심 때문에 앞으로 없어질까? 아니다, 역사를 통해 보고 배웠듯이 개입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기술 수준이나 환경에 대한 인식의 혁신 없이는 새로운 전염병이 앞으로 더 많이, 더 빠르게, 더 복잡한 형태로 우리를 찾아올 것이 자명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마스크를 쟁여놓고 통조림과 라면을 잔뜩 쌓아 놓고 살면 마음이 편해지는 것일까? 인류는 빠른 기간만에 눈부신 양적 변화를 가져왔고 질적인 변화의 초입에 있다. 공장 대량 생산은 기술과 만나 개인 맞춤형 제품과 서비스를 만들어 내고 있다. 이제 개발과 환경 보호 균형의 경각심도 변화를 불러오기 시작했다. 막 불붙기 시작한 글로벌 과제, 그린 뉴딜의 잔잔한 물결을 거대한 파도로 만들고 정착시켜야 한다.
정보가 넘쳐나고 전보다는 투명하다고 할 수 있는 사회에 살기 때문에 비판적인 시각을 갖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목소리가 모이고 감시의 눈이 많아지면 쉽게 여기지 못할 것이다. 의혹을 파는 사람들에서 담배 규제산업에 제동을 가한 권력가들의 횡포 같은 일은 더 이상 수면 아래에 감춰져 있기만 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보다 더 즉각적인 효과를 가져오는 것은 시민성이 아닐까? 이 시국에 굳이 밀폐된 클럽에서 욕구를 풀어야 했을까? 이 시국에 광화문에서 대규모 집회를 벌여야만 했을까? 이 시국에 종교를 앞세워 죄를 인정하지 않고 비협조적으로 나오고, 심지어 굳이 마스크를 벗고 역겨운 미소와 함께 통화를 해야 했을까? 사람들의 마인드 자체에 유의미할 정도의 변화가 없다면 역사는 계속해서 반복될 것이다.
코로나 사태가 장기화되면서 사람들의 인내에도 한계가 오는 듯 보인다. 여기에 이기적인 행동은 사태를 악화시키고 더욱 길게 만들고 있다. 그리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사회의 약한 고리, 서민층에서부터 나타나는 게 서글픈 현실이다. 정말 슬픈 현실이다.
이번 코로나 19 사태가 의미하는 바는 크다고 본다. "이번에는 다르다"라는 말이 현실이 되었으면 한다. 전 세계에 위험의 메세지를 제대로 보냈고, 초기 방역의 중요성을 모두가 보고 느꼈다. 이를 계기로 제약 바이오 기업들에 대한 투자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성장의 가능성 또한 크게 보인다. 어쩌면 앞으로 올 전염병의 결과는 다를 수 있다는 기대감을 가져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