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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내 편으로 만드는 방법 <행운에 속지 마라>서평/Book. 2025. 4. 1. 16:00
나심 니콜라스 탈레브 - 행운에 속지 마라
'위대한 것이 살아남는 게 아니다, 살아남는 게 위대한 것이다'
요즘 유튜브를 켜면 양자역학에 대한 인기 동영상들이 여럿 보인다.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되는 현상들이 실제 우주의 본모습이라는 사실이 흥미롭다. 하지만 양자의 영역까지 가지 않더라도 대부분은 실제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전혀 모르고 살아간다.
그저 운 좋게 일어난 많은 일들에 미사여구를 붙여 아름답게 포장하면 그게 사실인양 받아들인다. 전문가라는 사람의 말을 믿을 뿐, 그 사람이 어떻게 전문가가 되었는지 따지지 않는다. 우연히 일어난 일에서 패턴을 찾아 거기에 의미가 있다고 믿기도 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뇌가 그렇게 받아들이고 해석하기 때문이다. 매 순간 예측을 하고 그럴싸한 인과관계를 끊임없이 찾아다닌다. 보이지 않는 고릴라는 내 세상에 절대로 존재하지 않게 된다. 모두 각자의 세상에 살아가며 각자의 해석과 의미부여를 하게 된다. 보이는 것만 보이고, 보고 싶은 것만 보게 된다는 말은 뇌과학적으로 사실이다.
우리는 운의 영역을 보지 못한다.
동전 던지기의 결과를 10번 연속 맞춘다면 그 사람은 동전 던지기에 대해서 무언가 아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그 예측에 참여한 사람이 5000명이라면 몇 사람은 그저 운으로 결과를 맞추게 된다.
6 연발 권총으로 러시안룰렛에서 살아남으면 100억을 준다. 여기서 살아남은 사람은 영웅담을 쏟아내고 언론은 주목한다. 하지만 이게임을 두 번째, 세 번째 진행할수록 영웅담을 들을 기회가 점점 사라져 간다. 하지만 이 게임에 참가하는 사람이 무수히 많다면, 많은 영웅담이 쏟아져 나온다. 심지어 현실에서 벌어지는 러시안룰렛의 총구는 개수를 알 수 없다. 위험한 도박은 멈추지 않고, 새로운 생존자들의 영웅담은 지속된다.
매년 성과를 자랑하는 주식 트레이더들도 마찬가지 일 수 있다. 표본 집단의 수가 크면 클수록 그 안에서 우연히 뛰어난 성과를 보이는 사람들이 여럿 등장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우리에게 보이는 건 거대한 표본 집단이 아니다. 단지 살아남은 생존자의 입이 어떤 믿음을 전파할지 기대할 뿐이다.
이 모든 게 단지 '운'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저 우연히 그런 일이 벌어진 걸지도 모른다. 거기에 어떤 해석과 의미를 붙여도 운을 설명할 수는 없다. 확신이 깊어질수록 앎에서 멀어지게 된다.
저자, 나심 탈레브는 <행운에 속지 마라>를 쓴 이유를 명확하게 밝힌다. '실력으로 위장한 행운, 결정론으로 위장한 우연을 까발리기 위해서.' 운을 인지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은 살아가며 겪는 많은 출렁임에 쉽게 휩쓸리게 된다. 굵은 선을 따라가는 게 아니라 얇게 요동치는 변동성에 휘말린다.
'생존에 유리했던 방식의 민낯’
우리는 앞서 러시안룰렛의 승자들로 살펴본 생존자 편향을 비롯해 여러 편향을 갖고 살아간다. 내게 보이는 것만 보고 판단하는 시스템이 장착되어 있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고, 인지하지 못하는 영역은 판단 고려사항이 아니게 된다.
뇌의 에너지 소모를 최소화하고 최적화하는 방식은 그간 생존에 유리하게 작용했다. 덕분에 호모 사피엔스는 살아남아 먹이사슬 정점에 위치했다. 하지만 현대에 사는 우리는 한때 유리했던 방식 때문에 고통받게 된다. 과거에 진화한 뇌는 복잡해진 현대를 살아가기에 취약한 구석이 많다.
인간은 일어나지 않은 일을 고려하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 심사숙고하지 않는다. 단지 앞에 놓인 현실을 보고 살아남은 것, 대표성을 띈 것 을 기준으로 판단할 뿐이다. 승자의 역사라는 말이 있듯이, 승자가 만든 스토리가 진리인 것처럼 교과서에 실리게 된다. 우리에게 일어나지 않은 역사는 고려 대상이 아니다. 그렇게 확률과 운의 영역은 철저히 무시당한 채 보이는 것이 전부가 된다.
보이는 것만 가지고 원칙을 도출하는 오류도 저지른다. 대표적으로 블랙스완이 그렇다. 지금까지 본 모든 백조가 흰색을 띤다고 세상에 모든 백조가 하얀 건 아니다. 이러한 희귀 사건 또한 우리의 고려대상이 되기 힘들다. 하지만 일어났을 때 결과를 생각한다면 최악을 대비하는 태도가 생존에 직결된 문제라는 걸 알 수 있다.
보이는 것만 보고, 희귀한 사건을 무시해도 당장 사는데 문제는 없다. 1000만 분의 1 확률 게임에 참가한 한 명이 내가 아니면 된다. 하지만 문제는 ‘시간’에 있다. 시간이 늘어날수록 심사숙고해야 할 대상은 늘어난다. 더 큰 문제는 무엇을 심사숙고해야 하는지 조차 알기 힘든 지점이 온다는 점이다.
뇌는 태생적으로 인과관계를 좋아한다. 에너지 효율적이고 세상을 이해한다는 기분이 들게 해 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과관계, 하나의 스토리는 찾으려고 애를 쓰면 어디서든 발견되기 마련이다. 정확함보다 명확함을 더 중시하기 때문에 찾기만 하면 만족하고 넘어간다.
'운과 시간'
운을 인지해야 하는 이유는 시간에 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길기 때문이다. 근시적인 관점으로 살아간다면 낮은 확률의 사건을 만나거나 최악을 대비할 필요를 못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삶의 중요한 의사결정들이 그렇듯 길게 봐야 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운의 영역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운이 시간을 만나면 확률은 더 정확해진다. 동전 던지기를 10번 하는 것과 1000번 하는 결과는 큰 차이가 날 수 있다. 운 좋은 결과가 단기적으로 나오더라도 길게 보면 평균에 회귀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살면서 가끔 극단값을 마주하게 된다. 하지만 초심자의 행운은 끝이 지저분 하기 마련이다.
단기적으로 본다면 시간이 운 좋게 내 편이 되어 줄수도, 큰 불운을 가져다줄 수도 있다. 하지만 길게 본다면 시간은 나의 역량만큼, 내 실력만큼 결과를 가져다준다. 그렇다면 답은 내 역량을 높이는 방법이다.
운을 제대로 바라본다면 실력과 혼동하지 않는다. 운 좋게 성공한 일은 실력으로 다시 성공 재현할 수 없다.
역량과 함께 시간을 내편으로 만드는 방법은 살아남는 것이다. 성공적인 삶의 궤적이 멀리서 보면 우상향 한다 해도, 가까이서 보면 울퉁불퉁하다. 마치 주가 차트와 같다. 중간중간 마주하는 극단의 위기에서 살아남으려면 리스크를 관리해야 한다. 시기와 상황에 따라 리스크는 달라지고, 대비도 다르게 해야 한다.
시간을 내편으로 만든다면 복리의 힘을 마주하게 된다. 우리의 직관으로 복리를 바라보기 힘들다. 비선형적인 그림을 직관적으로 그려내기란 쉽지 않다. 미미한 시작이지만 누적되면 기하급수적으로 올라간다. 후반부로 갈수록 파이는 커지게 된다. 살아남은 자에게 주어지는 마법 같은 선물이다.
'어떻게 살아가나'
'확신'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보게 된다. 내가 보지 못하는 부분이 있다는 점을 인지하자. 이 점을 아는 것만으로도 의사결정의 질이 올라가는 기분이다. 아무리 확신이 들어도 겸손함을 잃지 않아야 한다. 애덤 그랜트가 말하는 확신에 찬 겸손이 필요한 시간이다. 내가 내린 결정에 얽매이지 말자. 다시 생각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둬야 한다. 과거의 나에게 틀렸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한때 전부라고 느껴지던 것이 지금 와서 아무렇지 않은 경우가 얼마나 많았나?
보이지 않는 것을 생각하는 과정은 쉽지 않아 보인다. 일어난 일을 일어나지 않은 일과 동시에 생각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하지만 일어난 일을 보면서 곱씹어 볼 수는 있다. 인지했기 때문에 고려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변화의 시작에는 항상 알아차림이 있다.<행운에 속지 마라>가 남겨준 큰 여운중 하나는 '권위'에 대한 태도다. 살아남은 것은 가치 있다. 하지만 살아남은 방식 모두가 가치 있다고 할 수는 없다. 순전히 운으로 살아남은 대상이 헛소리를 퍼트리고 다닐지 모른다. 권위에 쉽게 순응하지 않아야 한다. 러시안룰렛으로 살아남은 생존자를 바라보는 올바른 시각은 살아남은 1발만 보는 게 아니다. 일어나지 않은 나머지 5번의 방아쇠 당김을 같이 생각해야 한다. 누군가의 손에 쥐어있는 거액의 돈만 볼게 아니라, 그 돈이 어떻게 그 손에 들어갔는지 같이 고려해봐야 한다.
운은 도처에 작용하고, 길게 보면 평균으로 회귀한다. 그래서 우리는 역사에서 기저율을 배워야 한다.
결국 의사결정을 섣부르게 하지 않고, 최악을 상정해 보는 태도가 어느 정도 답이 될 수 있다. 무작정 안전한 길만 택할 수는 없다. 아마 무엇이 리스크인지도 모르는 상태에도 놓이게 될 것이다. 불운도 맞이할 가능성이 있다. 중요한 점은 하락 국면에서 생존할 수 있는 여지는 남겨두고 의사결정을 하는 것 같다.
양자역학이 세상의 본모습을 보여준다고 한다. 동시에 양자역학을 이해했다고 말하는 사람은 이해하지 못했다고 말한다. 나심 탈레브의 <행운에 속지 마라>도 비슷한 것 같다.
이 책은 세상의 본모습 일부를 보여준다. 나는 한 번 읽어본다고 완벽하게 이해하지는 못했다. 중간중간 '그래서 어떻게 하라는 건데?'라는 의문도 들고 내용의 공허함을 느끼기도 했다.
하지만 글을 쓰다 보니 운과 시간이 말해주는 세상의 모습이 조금은 잡힐 듯하다. 의사결정의 좋은 기준을 얻은 기분이다. <안티프래질>에 이어서 또 한 번의 울림을 받은 책이다. 앞으로의 도전에 큰 힘이 되어줄 것이다.
<행운에 속지 마라> +
권위에 대한 오해
운의 영역
시간의 역할
섣부른 확신, 확신에 찬 겸손함, 다시 생각하기
일어나지 않은 일과 희귀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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