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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와 퇴보는 한 글자 차이다 <다시 보는 5만 년의 역사>서평/Book. 2020. 7. 25. 20:50
다시 보는 5만 년의 역사 - 타밈 안사리.
'기록의 힘, 5만 년의 역사'
사람들은 판단해야 할 상황에 놓이면 먼저 자신의 경험 기억을 돌이켜 본다. 개인의 역사를 들춰보는 것이다. 또한 위인의 자서전을 집어 들면, 그 사람의 역사를 들여다보고 배울 점을 찾을 수 있다. 자라온 가정환경, 한 가정의 역사는 개인의 정체성에 큰 부분을 차지한다. 개인보다 큰 집단도 마찬가지다. 기업과 국가는 눈앞에 처한 불확실성에 더 나은 대안을 제시하기 위해 역사의 선례를 찾아본다.
우리는 역사를 만들고, 그 역사를 통해 배운다.
어떻게 보면 역사는 하나의 자산이고, 역사를 안다는 것은 경쟁력을 뜻하기도 한다. 우리가 살아가는 21세기, 정보화 세계에서 각광받는 자산 중 하나는 '빅데이터'이다. 빅데이터는 디지털 세상의 거대 기록이자 역사라고 볼 수 있다. 디지털 세상에서 개인이 남긴 데이터는 여러 정보를 담고 있다. 하지만 그 역사의 주인공은 단지 한 나라의 시민이 아니다. 전 세계 사람들의 목소리가 합쳐놓은 것이다. 그래서 눈에 보이지도 않는 무형자산에 기업이 천문학적인 돈을 지불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렇듯 역사는 단지 과거의 기록에 그치지 않고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영향을 끼친다. 그게 역사를 배워야 하는 이유가 아닐까 느꼈다. 이러한 역사를 안다는 것 자체로도 하나의 자산이 되어준다. 그런데 오늘 소개할 책은 한 사람의 역사, 한 나라의 역사를 떠나 지구 5만 년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무려 5만 년의 자산 속에는 무엇이 들어 있을까?
타밈 안사리의 「다시 보는 5만 년의 역사」는 역사에 무지하던 나에게 거대한 서사를 보여주었다. 그리고 그 거대 서사들이 서로 영향을 주고, 부딪히고, 섞이는 과정들이 마치 높은 곳에서 바라보듯 한눈에 펼쳐졌다. 그 5만 년의 자산 속에서 크게 세 가지를 느꼈다. 연결의 힘과 변화의 용기, 인간의 능력, 그리고 역사를 통해 본 현재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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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컨텍트, 커넥트'
역사를 보니 바뀌지 않는 큰 맥락 하나가 있다. 예나 지금이나 변화를 두려워하고 나아가지 않으면 필히 도태한다. 자신을 최고로 여기고 문을 굳게 닫은 채 교류하지 않는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반대로 말하면 교류하고, 상호작용을 통해 변화하면 도약한다. 심지어 자의가 아닌 타의로 어쩔 수 없는 변화에 맞닥뜨린다 해도 준비가 되어있다면 도약을 한다.
중국의 예를 들자면, 과거 위대한 발명품을 다수 만든 중국은 자신들의 기술에 과도한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그 결과 다른 나라에는 자신보다 뛰어난 기술이 없다는 생각에 문을 닫고 일방적인 교류만 유지했다. 하지만 이건 큰 실책이었다.
중국의 기술은 다른 나라에서 끊임없이 개량, 개선되며 그 나라에 유의미한 변화들을 불러왔다. 반면에 폐쇄적인 자세를 유지하던 중국은 그 자리에 머물렀고, 그 결과 더 나은 기술을 갖고 있는 국가와의 싸움에서 현실의 벽 몸소 느끼며 하락의 길을 걸었다.
이렇듯 자의로 연결의 힘을 차단한 결과는 참혹했다. 하지만 타의로 연결의 힘을 느끼고 도약한 경우도 존재한다. 과거에는 개인과 개인, 국가와 국가, 문명과 문명의 연결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지금처럼 거주지와 정확한 국경이 없던 시기에 개인, 국가, 문명은 지속적으로 이동하고, 팽창했다. 그 과정에서 다른 무리와의 접점이 생겨나고 그곳에서 변화의 힘이 자라났다.
이동하고 팽창하는 두 무리가 만나면 자주 싸움이 일어났지만, 교류 또한 이뤄졌다. 새로운 물건, 문화, 종교, 사람들이 섞이기 시작했다. 이 새로운 연결은 새로운 것의 탄생을 알렸다. 반대로 한 무리가 일방적으로 팽창해 침범하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이 경우는 다소 과격하지만 그 속에서 이뤄지는 교류는 여전히 존재했고, 새로운 연결과 탄생은 멈추지 않았다.
역사의 거대한 교류를 떠나 당장 주위를 둘러보면 비슷한 사례를 쉽게 찾을 수 있다. 한 공간에서 기성세대, 밀레니얼 세대, z 세대, 꼰대 등등 여러 세대 교류의 장이 펼쳐지고 있다. 거기서 과연 자만에 빠져 문을 닫은 사람이 도약할까? 상호작용 없이 변화를 두려워한다면 나아갈 수 있을까? 도태되지 않고 도약하는 준비된 사람의 자세는 무엇일까?
정답은 역사 속에서 찾을 수 있다.
'종교, 참을 수 없는 존재의 무거움'
두 발로 걷는 영장류를 지금의 인간의 위치에 올려놓은 능력을 고르자면 사회성, 도구 사용, 실체가 없는 것에 대한 믿음 이 세 가지라 생각한다. 이에 종교는 역사 속에서 인간에게 적합한 도구이자 강력한 무기로 사용됐다.
인류의 역사에서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요소 중 하나인 종교. 타밈 안사리의 「다시 보는 5만 년의 역사」를 통해 본 종교의 민낯을 보았다. 감히 단언컨대 현재 존재하는 그 어느 종교도 원형의 모습과 같지 않다. 역사의 섞임 속에서 가장 큰 영향을 받은 곳 중 하나가 종교이기 때문이다.
서로 다른 종교는 영향을 주고받으며 끊임없이 변화해 왔다. 책을 통해서 본 종교의 섞임의 과정과 연관성을 놀라웠다. 전혀 접점이 없어 보이는 종교는 서로의 경계에서 만나 특징을 공유했다. 가장 놀라운 사실은 그 특징들이 모여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는 사실이다.
개인적으로 종교에 대해서 언급하는 게 편하지만은 않다. 이번 책을 통해 니체의 노예 도덕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어렴풋이 알게 되었고 적잖은 충격을 주었다. 그리고 당시의 종교를 보니 지금처럼 사람들이 다 같이 모여서 평화롭게 찬송을 하는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다.
역사를 통해서 본 끊임없이 변화하는 종교는 힘을 위한 도구로써 사람들을 응집시키고 복종시키는 무기로 사용된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인간은 특정한 무리를 하나로 묶기 위해서 종교를 앞세우고, 심지어 종교의 이름으로 전쟁을 벌이기도 한다. 참혹한 모순이 아닐 수 없다.
믿음은 뿌리부터 아이러니한 부분이 많다. 산 사람을 제물로 바치고, 피를 보며 서로의 것을 쟁취하고, 한 사람의 지도자가 군림하며 권력을 남용한다. 그 후 끊임없이 변화하는 종교는 권력을 위해서든, 신을 영접하고 계시를 받았든, 학문적인 사상을 퍼트리려 시작했든 상관없이 변질되었다. 믿음의 단체 한 구석에서 '극단적인' 무리가 탄생하고 믿음의 가지치기가 시작된다.
믿음에 한 축에는 사회성이 있을 것이다. 당시의 사회성이라 하면 지금과는 차원이 다른 것을 의미한다. 바로 '생존'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지금보다 사회적인 흐름을 반하는 행동을 하기 더욱 어려웠을 것이다. 충분한 지지자들이 없다면 나 홀로 정글에 뛰어드는 자살행위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채택된 종교는 환경을 섬기기 위해서든 권력을 위해서든 한 부족이 믿음의 대상을 택하면, 점차 그것을 따르는 방향으로 흘러갔을 것이다.
종교는 허황된 것이란 얘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내가 주목한 점은 인간의 특성이었다. 사회성과 실체가 없는 것을 믿는 능력이다. 신용의 개념을 시작으로 화폐와 자본사회를 가능 캐 만든 이 능력은 종교에서 더 큰 힘을 발휘하는 듯 보인다. 이러한 거대한 능력은 필히 주의를 요한다. 무분별한 믿음이 역사의 급진적인 교파와 다를 게 무엇일까? 한번 믿음이 굳어지면 점점 강화하는 방향으로 가는 경우가 태반이고, 시간이 지날수록 더 선명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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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페이지에 5만 년의 역사를 담을 수 있는 사람은 흔치 않다고 본다. 거기에 유기적으로 연결을 더해 풀을 수 있는 사람은 더욱 적을 것이다.
책을 덮으며 학교에서 이렇게 역사를 배웠으면 하는 아쉬움이 맴돌았다. 국사, 역사, 세계사 모두 담쌓고 살아오던 내가 역사에서 재미를 느끼는 순간이 오리라 생각지도 못했다. 기원 전이나 과거 아마득한 연도가 나오면 눈을 감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하지만 타밈 안사리의 다시 보는 5만 년의 역사는 그 과정마저 재미를 더해 줬다. 비슷한 시기에 지구 반대편에서 일어나는 일까지 모두 다루기 때문이다. 그리고 역사적 사건들이 하나의 점으로 모여 합쳐지는 순간 묘한 짜릿함을 느꼈다.
배우고자 하는 분야의 가장 쉬운 50%를 먼저 공부한다. 큰 틀을 공부했다면 디테일로 들어간다. 조던 피터슨이 말한 공부의 방법이다. 나는 지금까지 반대로 공부했다. 느닷없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나라의 역사를 디테일부터 듣고 있자니 잠이 안 올 수가 없다. 디테일을 먼저 배우고 연결을 시키려니 힘들 수밖에 없다. 큰 틀을 쌓고 공백을 채우려는 노력을 안 한 내 잘못이 가장 크지만, 이제라도 알았으니 다행이다. 그런 의미에서 타밈 안사리의 「다시 보는 5만 년의 역사」는 훌륭한 출발점이 되어 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역사를 보니 홀론의 개념이 다시 한번 떠오르고 모든 게 보이든 보이지 않든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느껴진다. 전혀 연관이 없어 보이던 만리장성과 유럽 세계는 연결된 상태였다. 아메리카 대륙과 아프리카 사이에 놓인 거대한 바다도 연결을 막지는 못했다. 역사 속 하나의 발견은 반대편에 까지 영향을 끼치며 거대한 서사를 만들어왔다.
역사를 통해서 본 현재는 불안정했다. 거대한 무언가가 꿈틀거리고 이미 변화는 빠르게 시작되고 있다. 일부 과거와 다른 점이 있다면, 거대 서사들이 요동치며 섞임의 과정을 거치지 않는 경우가 있다는 점이다. 지금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스며들어 충분한 영향력을 갖추면 충격을 주어 섞임을 선포한다. 순서가 바뀐 것이다. 우리 삶에 깊숙이 들어온 거대 테크 기업들만 봐도 인지하지 못한 상태에서 없으면 안 될 것으로 자라났다.
저자가 우려를 표한 기계화는 충분히 고민해봐야 할 과제다. 이 도구가 주도하는 세상에는 '사색'이 자리 잡아야 할 공간은 '검색'이 모두 차지했다. 생각의 부재가 발생하고 편리한 생각 아웃소싱이 이미 충분히 진행되었다. 도구에 대한 무분별한 믿음과 의존이 우리의 눈을 멀게 한 것이다. 어딘가 비슷한 흐름을 역사 속에서 본 것 같다. 그렇다면 그 답 또한 역사 속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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